*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크게 화제가 된 암살 사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제 35대 미 합중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현지시간 12:30(18:30 UTC)에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암살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케네디는 딜리 플라자에서 카 퍼레이드를 실시 중이었고,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아 치
명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11월 22일의 달라스 유세를 결정한다.
1) 1964년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위한 민주당 선거자금 기부 모금을 위해,
2) 재선을 향한 선거활동을 위해,
3) 정치적으로 대립 중이던 텍사스의 민주당 유력 멤버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달라스 교외의 달라스 트레이드 센터에서 연설을 실시하기 위해, 자동차 퍼레이드는 러브
필드 공항에서 딜리 플라자를 포함한 다운타운을 통과하기로 계획되었다. 당시 케네디가
탑승한 차량은 1961년형 링컨 컨티넨탈, 오픈탑 개조 리무진이었다.
대통령의 동승자는 아내인 재클린 케네디를 비롯하여 텍사스 주지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백악관 비밀요원 등이었다.
그러나 당시 케네디가 탑승한 그 차량은 방탄장비가 되어있지 않은 차량으로, 방탄 장비를
갖춘 대통령 전용차량 확보계획은 1963년 10월에서야 추진되어, 당시까지는 따로 방탄장비
를 탑재한 전용차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달라스의 도처, 특히 자동차 퍼레이드 루트에는 케네디에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이들의 플랭
카드가 많이 걸렸는데 심지어 11월 22일 당일에는 케네디 비판자들에 의한, 케네디를 수배한
다는 내용의 부고장이 실린 전면광고까지 게재된 바 있다.
암살 당시 케네디 일행의 차량행렬은, 케네디가 몇 명의 수녀, 아동과 악수를 위해 2번 멈춘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 일 없이 퍼레이드 루트를 통과했다. 큰 길에 들어선 리무진 앞으로 한
남성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보안요원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12시 30분.
케네디를 실은 리무진이 텍사스 교과서 창고(Texas School Book Depository)에 가까이
다가간 후 천천히 방향을 돌려 그 창고를 벗어나기까지.
그 69초 사이에 케네디가 저격당했다.
암살 당하는 순간의 리무진 속도는 9~13마일이었다. 그를 향한 세 발의 총탄 중 첫 발은
빗나갔지만 다른 한 발이 케네디를 명중, 관통하여 텍사스 주지사까지 다치게 하였고, 마
지막 한 발은 케네디의 머리 부분에 치명상을 입혔다.
케네디 저격에 관해서는 그 무수한 음모론과 당시 저격 상황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지만,
일단
케네디가 2발 이상의 총격을 받았고,
마지막 총탄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라는 사
실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모든 이가 인정한다.
첫 발이 발사된 이후 군중들 사이에서는 여러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첫 발을 폭죽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텍사스 주지사가 "My God, they are going to kill us
all!"하며 부상을 입은 직후 저격사실을 외쳤고 그제서야 차량 운전자는 상황을 깨달고 신
속히 반응했다. 당시 그 운전자는 재빨리 뒤돌아 보고 소리치는 주지사와 대통령을 확인
했는데, 그는 그 덕분에 머리 부분에 치명상을 입은 케네디를 육안으로 실제로 목격한 유
일한 사람이 되었다.
케네디는 총격을 받은 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리무진은 곧바로 속도를 높여 딜리
플라자를 벗어나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향했다.
부상자대통령의 리무진에 동승했던 텍사스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그의 부상은
케네디가 입은 최초의 부상 직후에 발생했는데, 케네디를 관통한 총탄에 의해 부상을 입은
것이 유력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부상 직후 주지사의 부인은 그를 무릎 위로 엎드리게 하고 감쌌는데, 그것이 가슴의 총상
(상처입은 폐로 공기가 유입되고 있었다)을 막아 결과적으로 그를 살린 조치가 되었다고,
의사는 증언했다.
제임스 터크(암살을 목격한 관중 중 하나)는, 케네디가 총격된 위치에서 전방 대략 80미터
지점에 서있었지만, 발사탄의 파편에 의해 오른쪽 뺨에 상처를 입었다.
암살기록
안타깝게도 저격 순간의 퍼레이드 행렬이 통과하는 지점은 그다지 중요한 지점이 아니었
기에 라디오 및 TV 모두 현장을 라이브로 중계하지 않았다. 행렬 후미의 미디어를 제외하
면 거의 모든 보도 기관은 트레이드 센터에서 케네디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딜리 플라자에서의 암살 현장은 무음 8mm 필름에 26.6초간 기록되었다. 아마츄어
카메라맨이었던 에이브라함 자프루더가 찍은 그 필름은 훗날 자프루더 필름(Zapruder film)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훗날 케네디 암살에 관한 연구에 많이 이용되었다.
자프루더 필름은 영화「JFK」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총격 당시 대통령 머리 부분의 파편
이 뒤로 흩날리는 장면 등에 의해 치명적 사격의 방향이 전방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분석되
었다. 그 후 재클린 영부인이 동요한 모습으로 차량 후방으로 움직여, 날아간 대통령의 뇌
파편을 주운 모습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당시 이 비디오는 FBI에 의해 몰수된 바 있으며, 내용의 일부 편집이 이뤄졌다. (훗날
FBI가 인정)
범인의 체포와 사살리 하비 오스왈드는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로 케네디 암살 80분 후 현장 근처의 극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그날 밤 케네디 암살용의로 재체포되었다. 암살범으로 체포된 오스왈드는
그러나 사건 이틀 후인 11월 24일 오전, 구치소로 이송을 준비하던 중 달라스 경찰본부의
지하통로에서 잭 루비라는 마피아에 의해 사살되었다. 참고로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 중
이었기 때문에 수백만에 이르는 미국인이 라이브로 그 순간을 목격했다.
루비가 오즈워드를 사살한 이유는「남편이 암살되어 슬퍼할 재클린 부인과 그 아이들을
위해서」,「슬픔에 찬 재클린이 법정에 서는 일을 막기 위해」라는 황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확실한 이유도, 어떻게 경찰 관계자, 혹은 매스컴 관계자도 아닌 루비가 경찰서
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도 끝내 풀리지 않았다. (이러한 미스터리 덕분
에 케네디 암살에 관한 '뒷배경이 있다'라는 음모론은 많은 탄력을 받았다)
또한 저격 직후부터 루비가 오스왈드의 행동을 수시로 뒤쫒았던 사실이 여러 인물을 통해
증언되었다. 하지만 루비는 사건에 대해 4년 후, 암으로 옥중에서 죽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네디의 사망 케네디를 담당한 파크랜드 병원의 관계자는 이미 도착한 상황부터 케네디는 사실상 사망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오후 1시, 심박이 정지하였고 대통령의 사망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텍사스 주지사는 그 날 두 번의 긴급수술을 받았다.
오후 2시가 지난 후, 무장한 보안 요원들에 의해 케네디의 사체는 에어포스 원으로 반송되었
다. 부통령이었던 린던·B·존슨은 케네디의 2대 뒤의 자동차를 타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죽음
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미 합중국 대통령으로 승격했다. 존슨은 러브 필드 공항의 에어포스 원
기내에서 이륙 전 취임 선서를 실시했다. 에어포스 원이 워싱턴D.C. 에 착륙한 후, 케네디의
사체는 검시를 위해 베데스다 해군 병원으로 반송되었다. 검시는 3명의 군의관에 의해 실시
되었다. 그리고 몇 장의 X레이 사진이 검시를 위해 촬영되었으나 그 사진들은 공식기록에서
빠졌다.
검시 사진검시 사진은 이하의 URL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jfklancer.com/MDsmall.html
http://www.jfklancer.com/Backes.html
암살 후, 반응
총격 그 직후부터 케네디의 죽음이 공표될 때까지 큰 혼란과 공포가 일어났다. 당시는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총격이 미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의 일부인가, 부통령은 무사한가 등이 확
인되지 않아 문의전화가 쏟아지는 바람에 워싱턴 D.C는 전화망에 약 1시간 가량 과부하가
걸리기도 했다.
케네디 암살 뉴스는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고, 뉴욕을 시작으로 많은 남녀가 울음을 터뜨
렸다. TV보도를 보기 위해 백화점에 사람들이 몰렸고 기도를 올리는 이들마저 있었다. 일
부 학교에서는 하교령이 내려졌고 텍사스 주 및 텍사스 사람들에 대한 반감, 폭력 행위가
보고되기도 했다. 또한 암살 직후 소련은「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라며 국제표명을
실시하는 등, 그 충격은 컸다.
케네디의 검시가 끝나고 그 관이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지자 밤낮에 걸쳐 약 25만명의 사람이
조문을 했다. 그 추모행렬은 거의 40블록에 이르렀다. 또한 케네디의 추도식은 즉시 전 세계
적인 규모로 행해졌다. 미국 정부는 케네디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뤄 11월 25일 전국적 규모
로 치뤘다. 장례식에는 소련을 포함한 92개국 220명의 고관이 참가했다. 추도식 후 관은 매
장을 위해 알링턴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암살의 배경
정치적 인물에 관한 암살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가장 먼저 의심되는 것은 그 암살의 배경
이다. 암살의 이유와 암살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으나, 아직끼지도 확실한 결론은 나
오지 않았다. 그 주된 원인은, 증거품의 공개가 정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제한되어 있거
나 대규모 증거 인멸로 보이는 조치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잭 루비가 오스왈드를 죽인 것은 암살사건의 진상은폐를 위함이라는 등의 음모론이
많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군산 복합체의 사주를 받은 정부 주범설」,「마피아 주범설」,「소련 KGB 주범설」
,「피델 카스트로 주범설」,「망명 쿠바인 주범설」,「전 CIA 국장 알렌 덜레스 주범설」,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주범설」,「대통령 자리를 노린 존슨 주범설」,「대통령 선거
에 패배한 닉슨 주범설」등, 오늘날까지 많은 가설이 제시되고 있다.
가설 중 하나인「군산 복합체의 사주를 받은 정부 주범설」같은 경우, 케네디의 급진적인
베트남 철수 계획이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해칠 것을 두려워 한 정부 내의 일부 세력이 대
통령의 경비를 약체화한 후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이다.
정부 측의 조사
두 개의 공식 조사가 있었으나 그 조사결과는 달랐다. 하나는 오스왈드의 단독범으로 결론
지었고, 다른 하나는 오스왈드의 공범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은, 흔히 '론 건맨 음모'라고 불리는데, 이 단독범행설의 경우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주요한 문제점
* 위원회의 조사결과 오즈왈드는「사격의 명수」처럼 일컬어졌지만 해병대 시절의 그의
기록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 자프루더 필름에 따르면 총격은 전방에서의 것으로 보이나, 그 경우 후방에 있었던 오스
왈드의 단독범행설은 곧바로 부정된다.
* 오즈왈드가 저격한 것으로 여겨지는 교과서 빌딩의 창가에는 나뭇잎이 방해가 되어 저격
하기가 어렵다.
* 정부측 보고(워렌 위원회)에서는 5초 사이에 3발을 발사했다고 보고하고 있으나 오스왈드
가 사용한 볼트액션 방식의 총으로는 5초 내에 3발을 발사, 2발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보통 사격의 경우 1,2,3회에 걸친 사격이 있을 경우 뒷 차례로 갈수록
조준 문제로 인해 명중이 더욱 어려워지나, 이 사건에서는 가장 정확한 사격이 오히려 3번
째 총탄이었다. 이는 훗날 전문가가 실시한 실험에서도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로, 대통령과 그 동승자가 입은 다른 피탄 지점(약 5개)은, 단 1발의
총탄으로는 도저히 그 궤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 오스왈드가 경찰서 내에서 살해되는 사태 자체가 설명이 안 된다. (경찰서 내에는 외부의
무기를 반입할 수 없다)
* 증거품 공개가 정부에 의해 2029년~2039년까지 제한되어 있다.
이상의 증거 등에 의해, 현재, 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암살을 정부가 관여한 음모설에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 외의 의문점
* 사건 당일, 달라스 시장의 지시로 인해 갑자기 퍼레이드 코스가 변경되었다. (관례대로
라면 역대 대통령은 직선 코스를 퍼레이드 하는 것이 보통이나, 케네디는 차의 속도를
떨어뜨릴 수 밖에 없는 우회루트를 주로 달리게 되었다)
* 원래대로는 반드시 대통령 부근에 있어야 할 비밀정보기관원들이 뒤로 물러나 있었다.
* 긴급 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차량 속도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나, 오히려 속도를 더 떨어
뜨렸다.
* 사체를 한번 도둑 맞았다. 또한 칼날에 의해 오른쪽 머리 앞 부분의 상처가 더해졌다.
* 검시를 맡은 의사는 탄환 전문 검시의가 아니었다.
* 증거품으로 제시된 탄환이 절대 진짜가 아니다. 총탄은 뼈에 맞으면 변형되는 것이 보통
이나 총탄에는 상처 하나 없다. (7.35mm×51 총탄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도 불명).
* 자료는 미국 공문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공개가능 시한은 2039년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도 이미 자료 대부분이 분실된 상태라고 한다.
목격자
암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기록한 이는 뜻밖에 자푸르더 뿐만이 아니다. 비록 자푸르더에
비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지만, 저격 순간을 필름으로 촬영한 이는 그 이외에 3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사건 발생시 딜리 플라자에는 32명의 프로/아마츄어 사진
작가들이 있었다.
미공표 문서
암살 순간을 자프루더보다 가까이서 필름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신원 불명의 여성이
한 명 있다. 그녀는 연구가들에 의해 바브슈카 레이디라고 불리는데, 다른 필름이나 사진
에는 분명히 그녀가 필름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참고 : 위키페디아 - 케네디 대통령 암살
http://en.wikipedia.org/wiki/John_F._Kennedy_assassination

가장 미국적이고 가장 프론티어적인 정신을 갖추었다고 일컬어지며 많은 사랑을 누린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당시 전 세계적인 충격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