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은 '에이프릴 풀'이라고 하여 서양에서는 유머러스한 장난과 거짓말을 주고 받는 날이다. 동양에서도 근자에는 만우절 문화가 도입되어 곧잘 장난스러운 거짓말을 주고받는데, 문제는 이 만우절 날 관공서에 장난 전화를 거는 경우다. 그리고 그 장난전화가 비극을 부른 일이 있었다.
1992년 4월 1일, 도쿄 니시닛포리 경찰서에는 이미 몇 차례의 허위 신고가 들어왔다. 90년에 조례된 허위신고에 관한 처벌 특별법에 따라 악의적인 허위신고자는 최대 100만엔의 벌금과 6개월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었지만 실제로 처벌에 이르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덕분에 그 날도 악질적인 장난전화로 인해 이미 경찰 인력은 풀타임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강도가 들었어요! 경찰을 보내주세요」
이미 한 차례 장난전화가 걸려온 번호로 또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서에서는 짜증이 났지만 규정상 다시 한차례 출동을 해서 현장을 확인해야 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문을 두드렸지만 신고자는 응답을 하지 않았고, 경찰은 첫 출동 때처럼 신중히 창문을 통해 집 안에 진입했다. 하지만 역시나 신고자는 방 안에서 태연히 TV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경찰은 법 조항을 내세워 겁을 주고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하였지만 신고자 역시 그 법이 사실상 유명무실한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뻔뻔히 대처하자 경찰은 결국 허탕을 치고는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30분 후 또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규정상 출동은 해야했지만 3번째 출동이 되자 경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번에도 거짓이라면 체포를 하겠노라며 분을 삭히며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자 정말로 현장에는 아까 그 신고자가 칼에 찔려 사망한 상태로 누워있었고 경찰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진상이 밝혀졌다. 현장 인근에서 실제로 강도를 계획 중이던 범죄자가, 두 차례나 경찰이 같은 집에서 장난전화로 허탕을 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 수법처럼 정말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거짓 신고자는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수사 얼마 후 범인은 잡을 수 있었지만, 만약 장난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범죄자가 그 집을 목표로 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고(훗날 법정에서 용의자는 그래도 아마 그 집을 털었을 것이다 라는 진술을 하기는 했으나 진술이 계속 바뀌어 그 발언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랬다면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양치기 소년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이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만우절이라고 하더라도 바쁜 관공서에까지 악성 장난을 치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매우 문제 있는 행동이겠지요.
1920년대 초, 독일의 하노버 역 주변에서 소년들이 하나둘씩 행방불명 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용의자로서 체포된 것은 프리츠 하르만. 그는 거리에서 발견한 미소년을 살해, 그 고기를 쇠고기라 속여 팔아치웠다. 피해자의 인육 중 일부는 소세지로 가공되기도 하였다.
보통 시체를 고기로 만드는 것은 살인 후 증거 인멸의 수단으로 사용되나, 이 경우는 오히려 목적이 식인이었으며 살인은 그 수단이었다. 때문에 그는「하노버의 흡혈귀」 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8년 도쿄도 아라카와구 일대에서는 야쿠자 내부의 항쟁 도중 간부를 살해 후 토막 내 분산 매장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범인은 피해자의 손목을 들고 달아나 라면 스프의 국물용 냄비에 삶아 인육 라면을 만들어냈지만, 국물의 맛이나 냄새로 이상한 것을 느낀 손님이 신고라도 할까봐 겁을 내 결국 판매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인육을 소재(?)로 한 다양한 범죄와 괴담이 있지만, 언제나 센세이셔널한 이러한 범죄… 그중에서도 프리츠 하르만 사건의 경우「미소년」,「식인을 위한 살인」,「소세지로 가공」 등 이러한 범죄에서 연상할 수 있는 아이콘을 총망라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에현 시마씨시 이소베쵸, 굴과 진주로 유명한 마토야만에 있는 면적 7km짜리 작은 섬「와타카노시마」. 에도시대에는 정박항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풍부한 어패류와 온천 등으로 현재는 리조트지이다.
현재 섬의 인구는 180가구 400명 정도이지만 섬에서도 정확한 인구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도민은 노인이 대부분, 아이는 초중학생이 10명, 보육원아가 3명이지만 모두 섬 바깥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젊은 사람 대부분은 여성이지만 다들 섬에 주민으로 등록을 한 것도 아니며 출입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도민의 수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섬에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그 이름하야「여자만 사는 섬(女護ヶ島)」
옛날 에도시대, 이 섬의 여성들은 돈을 받고 남자들에게 몸을 팔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섬의 주 수입원은 성매매였으며 오늘날도 그렇다.
섬에는 몇 개의 스넥바 같은 가게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성매매업소이다.
이 섬에서 성매매를 하려면 몇 개의 방법이 있다. 호텔이나 업소에서 여성을 지목해서 관계를 갖는데 특히 직접 업소에 갈 경우에는 [대실]이나 [숙박] 중에서 고를 수 있으며 숙박의 경우에는 여자 방에서 묵게 된다. 또한 선착장 주변의 포주와 거래를 하거나, 인근 식당에서 업소를 소개받으면 된다. 즉, 섬 도처에서 성매매를 알선하고 있는 것이다.
화대는 대실 2만엔, 숙박 4만엔. 한때는 중년 여성들만 가득했던 때도 있었지만 근래에는 일본 경제의 버블 붕괴와 함께 카드빚에 팔려온 젊은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우선은 보통 여관을 잡습니다. 손님이 남자일 경우, 자연스럽게 여관 측에서 묻습니다.
「젊은 양반, 놀고가야지?」
전형적인 수완가 노파의 풍모에 감동하며「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하고 대답.
「그런데 지금 저 할망구가 오면 어쩌지」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만, 여자의 얼굴을 먼저 보여주므로 안심.
관계를 가질 숙소 근처의 바로 안내를 받습니다. 젊은 여성이 혼자 카운터를 보고 있는 가게입니다. 거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곧 여자의 방으로 가게 된다, 라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친구 셋과 갔습니다만, 각각 다른 방으로 소개받았습니다.
제 경우에는 그 바의 여성이 상대였습니다. 방금 전까지 바에서 노닥거리던 여성과 관계를 맺게 되니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섬의 물가는 대단히 싼 편. 성매매와는 별개로 여행지로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다만, 배에 도착하자마자 손님들을 관찰(=감시)하는 남자가 반드시 있으니 주의.
현재는 불경기로 인해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손님도 격감하여 일반 손님들의 유치에도 힘쓰고 있어, 섬의 분위기도 많이 밝아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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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관한 일화 또 한 가지.
이 섬의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들이라는 제보를 받고 당시 그에 대해 취재하던 여성 저널리스트가 이 섬 인근에서 실종되었다.
1998년 11월 24일, 미에현 이세 시내에서 지역 잡지「이세시마」의 편집기자 츠지데 노리코.
경찰은 그녀가 무엇인가의 사건에 말려들었다고 보고 수사를 계속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1978년 3월 3일. 오사카의 집 근처에서 다바타 사쿠노스케(당시 3세) 소년이 자동차에 치었다. 사쿠노스케는 치인 직후부터 이미 중태였기 때문에 구급차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고, 운전자는
「제 차로 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라면서 사쿠노스케를 차에 태워 급히 병원으로 떠났다. 이윽고 어머니는 급히 아들이 옮겨졌을 인근 병원들에 연락했지만, 놀랍게도 어느 병원에 문의해도 소년이 교통사고로 실려온 기록이 없었다.
그렇게 사쿠노스케의 행동은 묘연해졌고 즉각 대대적인 수사가 이뤄졌지만 끝내 아이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고 1982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사건 자체는 별로 색다를 것 없는 뺑소니 류의 교통사고입니다. 사고 직후 아이의 상태는 중태였고 병원으로 후송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뤄볼 때 아마도 아이는 후송 도중 사망했거나, 혹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운전자가 아이를 중태인 상태로 유기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건 현장에 피해 아동의 부모나 지인이 있었다면, 아니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상황이면 당황스러워 어찌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아예 뺑소니면 달아나는 차 번호라도 외우겠지만, 운전자가 병원으로 후송하겠다며 떠난 직후라면 황망함에 그냥 깜빡할 우려도 있고 말이지요.
사람이 당황을 하게 되면 당연한 일마저 깜빡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가해자의 입장 역시 황망함에 이성을 잃고 엉뚱하고 끔찍한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점을 항상 잊지 말고 놀랍고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침착, 또 침착하도록 주의해여야 할 것입니다.
또 어린 아동이 홀로 어딘가에서 사고나 실종을 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연락처가 적힌 팔찌 등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두는 편이 좋겠지요.
* 사망자 118명에 이르는 대참사가 벌어진 1972년 오사카 센니치 백화점 화재사고에 관한 이야기.
백화점 화재 사고 당시, 점원은 근처 빌딩과의 연락 통로가 공사 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그 지점은 그저 단순한 합판으로 막았을 뿐이라고 확신, 그 곳까지 손님들을 유도한 후 공사지점을 가려두었던 커텐을 걷어치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벽은 나무 합판이 아니라 단단한 벽돌벽. 점원은 절망감을 느끼며 서둘러 다시 다른 통로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패닉 상태에 빠진 손님들은「이 벽만 부수면 안전지대로 갈 수 있다」라는 생각에 블록벽을 맨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손이 너덜너덜 걸레가 될 정도로 벽을 두드리다가 이윽고 화재에 질식해 죽고 말았다. 벽에는 피투성이 손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상식적으로 벽돌벽을 손으로 부수는 것은 무리. 하지만 사람이 패닉에 빠지면 그런 수준의 판단도 어려워진다.
당시 사건의 사망자 발생 지점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추락사와 점내 중앙홀과 개장을 앞둔 공사터 벽 앞. (그 외에도 많지만 우선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이 3곳)
우선 추락사의 경우「왜 그 높이(상식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에서 뛰어내리는가?」라는 의문의 경우「비정상적인 긴장감에 의해 높이 감각이 상실, 별로 높지 않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라고 합니다. (미국의 9.11 사고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높이에서 뛰어내린 사망자가 다수 있었습니다)
흔히들「어차피 죽을 것, 괴로움 없이 빨리 죽자」라는 각오로 뛰어내렸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보통은 그 반대로 생존을 확신하고 뛰어내린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살 수는 있다, 조금만 운이 따르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사한 사건 등에서 아주 운이 좋아 살아난 경우도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역시 대부분 생존을 확신하고 뛰어내린다고 합니다.
다음은 점내 중앙홀 사망자. 여기서만 약 30여 명이 덩어리가 되어 사망했습니다. 도면에 따르면 사실 이 곳은 이렇게까지 몰릴 이유가 없습니다. 칸막이도 없고 그저 테이블과 통로 사이. 사고 조사 당시에도 왜 창가도 출구 근처도 아닌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많이 사람이 죽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재구성한 결론으로는「우왕좌왕」이라고 합니다.
출구 쪽에서는 맹렬히 연기가 나오니까 다가갈 수 없었고(손님들 대부분은 홀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으므로, 다른 출구를 잘 몰랐던데다 엘리베이터는 화재로 멈춘 상태였기 때문에 도망칠 장소가 없었다) 가게 안은 점점 연기로 어두워졌지만 손님들은 가게 안의 지리를 몰랐기에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몰랐습니다. (창가로 도망친 고객들은 종업원 아니면 창가 쪽에 원래 있던 손님들 뿐)
또한 중간에 지배인이 손님들의 피난을 유도할 생각으로「이 계단으로 도망치십시오!」하고 백화점 중앙 계단의 문을 열었지만 그곳을 통해 아래층에서의 연기가 엄청나게 유입, 피해만 더 확대시켰다.
이 시점에서 일산화탄소 중독 탓에 시야도 신체도 더이상 컨트롤이 불가능해진 손님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다른 손님들도 거기서 발이 묶이며 그렇게 악순환. 그 탓에 한 덩어리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사실 그 백화점에는 제대로 된 비상계단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곳을 찾는 손님도, 생각해 낸 종업원도 거의 없었습니다.
비상 계단을 통해 도망친 사람은 훗날 조사에 따르면 단 한 명, 한 여직원 뿐입니다. 그녀는 우연히「비상 계단으로 출입하는게 편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일 출퇴근에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그녀는 사고가 났을 때도 그렇게 도망쳤는데,「도망칠 길은 안다면 사람들을 유도하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연기가 타고 올라오는 길을 돌진해야 하는 탓에 두렵다며 포기한 사람도 많았고 이미 많은 이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다수였다고 합니다.
UVB-76이란, 주파수 4625 kHz로 방송하고 있는 단파 라디오 방송국의 콜사인이다. 그 방송 내용에 의해「더 버저(The Buzzer)」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송국은, 하루 중 23시간 10분 (그리니지 표준시7:00~7:50 사이는, 송신기의 보수 점검을 하는 듯) 동안, 1분 간 약 25회의 페이스로 짧고 단조로운 버저음(샘플음)을 반복해서 계속 흘려보내며, 또 아주 드물게 러시아어 음성 메세지가 방송된다. 매우 부자연스럽고 수수께끼에 쌓인 방송 내용 때문에 오컬트/군사 관계자 사이에서는 꽤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진 단파 라디오 방송이다.
많은 추측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 방송국의 실제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1. 평소의 방송
「더 버저」는 적어도 1980년대 초기(1973년부터 라는 설도 있다)부터, 2초 간격으로 짧은 전자음을 반복해서 방송하고 있으며, 1990년 초 즈음에 버저음으로 바뀌었다. 2003년 1월 16일 한 때 음정이 높고 긴(1분에 약 20초 정도) 버저음으로 변경되었지만 곧 원래대로 바뀌었다. 버저음은 정시 1분전이 되면 중단이 없는 연속음으로 바뀐다. 이 연속음은, 버저음이 재개될 때까지 1분 동안 계속 된다.
때때로 희미한 잡음이나 대화소리가 버저음의 저 너머에서 들리는 경우도 있다. 즉, 이것은 버저음이 녹음방송이나 재생장치에 의해 자동 송신되는 것이 아닌, 버저를 발생시키는 장치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상시방송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2. 음성 메세지
지극히 드물게, 버저음이 중단되고 러시아어 음성 메세지가 방송될 때가 있다. 이것은 UVB-76가 방송된 20여년간의 역사 속에서 딱 3번만 관측되었고 그것도 모두 1990년대 후반에 벌어졌다.
3. 최초의 음성 메세지
최초의 음성 메세지는 1997년 12월 24일 21시 58분(동경표준시 12월 25일 06시 58분)에 방송되었다. 버저음이 갑자기 끊기고 짧은 신호음이 흐른 후, 남성의 목소리가 러시아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번째 음석 메세지는 2002년 9월 12일에 방송되었지만,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아마 마이크 헤드에 너무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는지도) 내용의 이해가 어렵다. 이 두 번째 방송의 일부 내용은....
≪UVB-76, UVB-76.
62691 Izafet 3693 8270≫
5. 세번째 음성 메세지
세번째의 음성 메세지는, 2006년 2월 21일 7시 57분(동경표준시 2월 21일 16시 57분)에 방송되었다. 역시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남겼다.
≪75-59-75-59.
39-52-53-58.
5-5-2-5.
Konstantin-1-9-0-9-0-8-9-8-Tatiana-Oksana-Anna-Elena-Pavel-Schuka.
Konstantin 8-4.
9-7-5-5-9-Tatiana.
Anna Larisa Uliyana-9-4-1-4-3-4-8≫
6. 단파 라디오국의 소재지와 기능
이 방송국의 송신지점은, 러시아 연방의 제레노그라드와 소네치노고르스크의 중간, 모스크바의 북서 40 km에 위치하는 포바로보의, 로제키라 불리는 작은 마을의 근교(56о04'58” N/37о05'22” E (56.08 N/37.08 E))에 있다.
무엇보다 이 방송의 목적이 너무나도 불분명하다. UVB-76의 정보에 대해 어떤 이들은「모스크바 군 관할부대와 신병 모집 센터에 명령을 송신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메세지가 방송되었던들 과거 최소 15년간은 그저 단순한 버저음만 송신했을 따름으로 그 주장은 확증이 없고 의심스럽다.
또한 송신기의 위치가 러시아 연방 참모본부의 통신거점이라는 소문과 함께, UVB-76은 단파 주파수로 존재하는 무수한 난수 방송처럼 스파이에게 암호화 된 메세지를 보내는 역할이라는 설도 널리 퍼져있다. (이런 류의 통신설비는 세계 각국의 군이나 첩보 기관이 사용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입증되거나 존재가 공식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이 특유의 끊임없는 소리의 송신은「데드 맨 장치처럼 군 또는 다른 어떠한 설비의 생존 신호(설비가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동안에는 신호를 계속 보내며, 신호가 끊어졌을 경우는 설비에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한다)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설이 있으며, 반대 해석으로「구소련 전 국토에 대한 수도 모스크바의 생존 신호로, 72시간 이상 이 방송이 중단되었을 경우 모스크바가 핵공격을 당했다고 간주, 미국에 대한 보복공격을 독자적인 판단으로 할 수 있다」라는 설,「핵전쟁 등의 극도의 긴장시를 위해 확보해 둔 주파수」라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는「미사일의 시계 역할」,「데이터 모뎀」등의 설이 있다.
7. 방송정지
2010년 6월 5 일경, 수십 년에 걸쳐 계속 버저 방송을 계속해오던 UVB-76의 버저음이 갑자기 정지했다. 원래 목적이 불명한 통신이었던만큼 이번 정지의 요인도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2009년부터 러시아의 통신위성이 동일한 버저음 전파를 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지상에서의 발신을 취소했다는 설이 러시아 국내의 사설 뉴스 사이트에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곧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정상적인 사회적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신도의 정신을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게 한다. 처음부터 다소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의 마음을 종교적으로 파고드는 경우도 있고, 정상적인 이에게 심리적 고양감(사이비 종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격렬한 종교적 행사 및 체험행위 등)이나 불안함(종말, 속죄에 대한 강요 등)을 심어 정신을 불안하게 한다. 그 과정에 종교를 개입하여 구원이나 심리적 안정, 현실적인 구제를 약속하고 종교의 탈을 쓴 각종 불합리한 행위로 신도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붕괴시킨다.
2. 불합리한 금전적 요구
신도에게 강요나 속임수(구원의 대가 등)를 통해 금전적 요구. 보통 사이비 종교에 깊숙히 빠진 이들은 자발적인 의사로 금전을 제공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 협박이나 강요, 주변 신도들의 압박를 통해 제공받는 경우도 있다.
3. 정든 생활 환경으로부터의 단절
사이비 종교에 빠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붕괴되어가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인들이 나서게 되므로 사이비 종교단체에서는 가급적 신도를 기존의 생활 환경에서 차단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신도의 관리 및 재교육을 위해 종교단체에서 직접 신도들을 자신의 관리 하의 격리된 환경에 두는 경우도 많다 (집단 거주 등)
4. 육체적 손상의 보전
일반적으로 의학의 힘으로 그 극복이 어려운 사례, 이를테면 난치병 환자나 장애를 가진 이에 대해 기적에 가까운 종교적 체험(대부분은 연출된 거짓사례)을 시연하고 제안하여, 건강한 몸을 바라는 이들의 희망과 기원을 악용하는 사례.
5. 아이를 확보
신도의 자식(주로 어린 아이)들을 확보. 그 과정을 통해 신도의 이탈을 차단한다. 처음에는 장시간의 종교활동을 위해 종교단체 측에서 아이들을 대신 돌봐준다는 명목이지만 차후에는 아이 자체를 인질로 삼아 신도의 이탈을 막고 불합리한 금전적, 육체적 요구를 제시한다.
6. 반사회적인 언설
종교에 보다 깊숙히 신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현재의 사회를 강력히 비판하고 그 해결책은 오직 자신의 종교 뿐이다 식의 주장을 편다. 또한 그럼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로 보다 더 많은 이를 구원해야 한다' 라는 신도 유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7. 공공질서의 교란
사회를 비판하고, 신도로 하여금 사회에 불만을 갖게 함은 물론 그럼으로서 그 불만을 공공질서의 교란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크게는 과격 종교단체의 테러행위부터, 작게는 고성방가를 동반한 포교 행위 등이 있다. 또한 사이비 종교가 저지르는 각종 범죄행위(금전탈취, 육체적 속박를 비롯한 각종 범죄 행위 등) 자체가 공공질서의 교란.
8. 잦은 소송사건
불합리한 일을 당해 이탈한 신도들이 해당 종교에 대해 제기하는 소송은 물론, 교단 외부와의 마찰 등, 사이비 종교는 그 규모가 커질수록 잦은 소송을 맞이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때문에 종교단체 측에서는 규모가 커질수록 외적인 이미지에 무척 신경을 쓰며, 신도들을 이용해 여론조작 및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9. 종래의 경제 회로로부터의 일탈
불합리한 금전적 요구를 가속화하기 위해 신도들의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경제적 활동을 막는다. 또한 그럼으로서 과도한 헌신 및 투자를 한 신도들의 경제적 종속을 유도, 이탈을 막고 보다 헌신적인 활동을 강요한다.
10. 공권력 침투의 시도
아무리 종교단체의 외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불합리한 운영은 결국 파국을 초래하기 마련이므로 공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노력을 시도한다. 초기에는 기존 권력과의 결탁 수준이지만 차후에는 정치정당 창당 또는 입후보 등 직접적으로 공권력 그 자체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1783년 5월, 아사마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폭발에 의해 엄청난 수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정말로 두려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화산 폭발로 인한 환경 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용암과 화산 폭발물이 인근의 논밭을 황폐화 시킨 것은 물론, 화산재와 이산화황이 온 하늘을 가득 덮고 햇빛을 차단한 채 지속적인 산성비를 뿌려댔다. 가뭄과 냉해, 화산재는 모든 곡식을 말라죽였고 그 후 몇 년간 일본 역사에 남는 대기근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텐메이 대기근.
당시 남부번에서 기록된 것만 아사자 40,850명, 병사자 23,848명, 가족 전멸로 폐허가 된 집이 10,545채가 발생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대기근이 혼슈를 휩쓸었다.
급기야는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지고, 그나마도 힘이 약해 남을 죽일 수 없는 이들은 밤에 갓 묻은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잡아먹고 자신의 아이를 오밤 중에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죽인 후 그 시체를 가져와 먹는 지옥도가 현실에 펼쳐진다.
당시의 참담한 지경을 묘사한 글 중에는「(식솔을 줄이기 위해)다시는 배고프다고 울지도 보채지도 않겠다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8살 딸아이를 돌로 내리쳐죽인 후 강에다 내버린」부모들의 이야기도 나오는 등 그 기아 사태는 가히 아수라에 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집도 땅도 버리고 다른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했지만 다른 마을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고, 여기저기서 난민이 발생하자 그나마 마을의 조직체가 살아있는 마을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도적떼로 변하기 전에 아예 먼저 다 죽이자는 이야기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필사적인 상황이었기에 죽고 죽이는 것은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아직 힘이 있는 젊은이들과 남자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인근 마을을 습격, 몰살시키곤 했다. 게다가 그렇게 죽인 시체들은 식량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좋은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라 어느 정도 자연재해의 영향을 덜 입은 지역의 마을 중 식량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마을 사람들은 난민들을 가엾게 여겨 자신들의 부족한 식량을 내주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오랜 시간 굶은 난민들은 대부분 밥을 먹는 순간 죽었다고. 몇 개월 간이나 변변한 식사를 챙겨먹지 못한 위에 갑자기 음식을 구겨넣으면 인간은 쇼크사하기 때문이다.
난민들은 눈알이 뒤집힌 채 모두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다 죽었고, 음식을 대접한 농민들 역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비극이 일본 전체에서 반복된다. 좋은 의도에서 한 생각이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부르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망명해 오는 난민들을 쫒아버리기 시작했고, 마을 인근은 아귀와 아사자로 넘쳐나 그 역시 지극히 처참한 광경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위령비가 세워진 마을은 아직도 일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대에 대해 자세한 민간의 언급은 대부분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다. 너무나 처참하고 모두가 죄를 저지른 그 시대, 그 참담함은 몇 대에 걸쳐서 단단히 입막음을 당했고, 또 그 처참한 사태에 스스로 입을 닫은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 피안화의 전설
강가에서 보기 쉬운 선명한 붉은색 꽃, 피안화.
사실 이 피안화는 독을 가진 식물로, 몇 년에 걸친 텐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온갖 곡식과 작물, 나무껍질마저 다 동이 나자 사람들은 이 독이 있는 꽃마저 먹기 시작했다. 물에 삶거나 살짝 데치면 일단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정도까지는 독을 뺄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식중독의 위험을 안은 채로 이 꽃마저 다 먹은 이들 앞에 최후로 남은 것이 바로 인육. 우선은 죽은 사람의 고기와 골수를 먹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어린 아이의 머리를 통째로 구운 후 꺼내먹은 뇌는 의외로 맛있었다고 한다.
즉, 인간세상이 아귀도로 타락하기 전,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인데다 피를 방불케하는 선명한 붉은색 꽃을 피우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피안화(彼岸花)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안(彼岸)이란, 강 건너 저쪽 둔덕이라는 뜻으로, 속세/현세와는 상대적인 개념을 일컫는다)
지금은 그저 그 선명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이 꽃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도 많은데다 심지어 꽃꽃이에도 자주 이용되지만, 비교적 연배가 있는 노인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재수 없는 꽃이라며 경원시 하는 이들이 많다.
* 어린 여아의 유괴 및 살해. 사체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그 사진을 찍어 사진을
피해 아동의 어머니 휴대폰에 송신. (피해자는 가명처리)
1. 사건의 시작
2004년 11월 17일, 나라현 나라시, 하교 도중의 여학생 K(초등학교 1학년)가 13시 40분쯤 어머니와 휴대폰으로 이야기한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었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18시 45분쯤 경찰에 연락, 함께 부근을 수색했다. 그리고 20시 04분,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K의 휴대폰으로 사진이 첨부된 메세지가 도착한다. 그러나 그것은 K가 보낸 메세지가 아니었다.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은, 끔찍하게 살해당한 K의 사체 사진이었다.
경찰은 즉시 유괴 살인으로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0시 06분, 유괴 현장에서 약 6km 떨어진 인근 도로 옆 도랑 안에 엎드린 채로 방치된 K의 사체를, 우연히 차로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 신고했다. 사체는 이빨이 몇 개나 뽑힌 상태였으며 얼굴이나 손발 모두 심각한 훼손이 가해진 상태였다.
다수의 목격자 증언을 통해 K를 유괴한 것은 30대 전후의 남자로, 차로 K를 데리고 사라진 것이 드러났다. 또한 사체 사진 메시지를 보낸 지역이 현장 부근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그 이상은 좀처럼 수사가 진전되지 않았다.
2. 휴대폰 기록
그리고 약 1개월 후, 12월 14일. 수사를 위해 경찰에 맡겨두었던 K의 휴대폰에 범인으로부터 2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다음은 여동생이다」라는 내용으로, 메시지는 K의 아버지, 친척들에게도 도착했다.
12월 25일. 사건에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 K의 휴대폰으로부터 어느 휴대폰을 향해 데이터가 송신되었던 것이다.
경찰은 데이터를 전송받은 휴대폰의 소유자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친구에게 휴대폰을 개통할 때 명의와 주소를 빌려준 것」으로, 실제 그 휴대폰을 사용하던 것은 그 친구였다.
그 휴대폰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이는 고바야시 카오루(小林薫. 36세, 신문 판매점 근무). 그는 살해한 K의 사체를 휴대폰으로 촬영, 그 사진을 K의 휴대폰에서 자신의 휴대폰으로 송신한 것이었다.
조사결과 고바야시는「이런 사진이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왔다」라면서 그 사체 사진을 주변 이들에게 과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3. 체포
12월 30일, 고바야시를 범인이라 확신한 경찰은 신문 배달을 끝내고 돌아온 고바야시를 긴급체포, 가택 수색도 실시한다. 그리고 방에서는 K의 가방과 휴대폰, 옷가지 등이 발견되었고 결국 고바야시는 범행을 인정했다.
그 날 그는 하교 도중의 K에 말을 걸어「차로 데려다 줄께」등의 교묘한 말로 차에 태운 후 약 10km 가량 떨어진 자신의 아파트로 유괴했다. 그리고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 K의 머리를 강제로 억눌러 살해했다.
고바야시는 1989년(당시 20세) 이미 여아에 대한 외설죄로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1년에도 어린 여아의 목을 조르다가 우연히 지나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그때는 징역 3년의 실형판결을 받았다.
출소 후 그는 신문 판매점에서 근무했지만 근무 태도가 매우 불량하고, 수많은 트러블을 일으킨데다 가게의 돈을 훔쳐 도망치는 등 여러 판매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4. 사형을 원한다
재판에서도 고바야시는 전혀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나는 사형을 원한다」라고 주장했다. 시종일관 도발하는 듯한 태도였다. 또한 피해자 유족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반복했다.
「내가 저지른 짓은 인간이 할 짓은 아니지만, 후회는 안 한다」
「바랬던 그대로 되어 만족한다. K의 부모 마음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나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없을 일을 경험했다」
「일종의 사회공부라고 생각하므로 반성은 없다」
「반성할 마음도, 그럴 자신도 없다」
「빨리 사형 판결을 받아 제 2의 미야자키 츠토무, 타쿠마 마모루 로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
(이빨을 뽑힌 채 피투성이가 된 피해자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별로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망가진 장난감이라는 느낌 밖에 들지 않았다」
(사체의 사진을 주변 사람들에게 과시한 이유에 대해)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사진이므로 주변에 자랑하고 싶었다」
(다음은 여동생이라는 메일을 보낸 이유에 대해)
「매스컴 보도가 뜸해져,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등이다.
2006년 9월 26일, 나라현 지방 법원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렸다. 변호인 측은 공소했지만, 고바야시의 의사에 따라 공소는 취하되어 10월 10일, 그의 소원대로 사형이 확정됐다.
* 아주 죄질이 좋지 않은 사건, 그리고 반성의 기색조차 없는 최악의 범인이란 점도 씁쓸한
부분이지만, 무엇보다 더이상 이런 범죄가 그저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으로 치부
할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섬뜩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게하는 점이겠지요.